806 文化の交流 / Kokura as Crossroads of Broad Cultural Exchange / 文化交流的中心地―小仓 / 文化交流的中心地―小倉 / 광법한 문화교류의 교차로 역할을 한 고쿠라

Guide No.806
細川氏の時代、藩主の忠興(ただおき)や忠利(ただとし)はローマ字の印を使い、「鎖国(さこく)」まではキリシタンの保護や、教会堂が建てられるなど、外国文化への関心は高かったようです。また、小倉には「唐船」が入港しており、対外貿易も盛んでした。「鎖国」後も北九州の地は、長崎から京都・江戸に通う外国使節の通路にあたり、さらには九州主要街道の整備によって、諸国文化の交差点となり、小倉城下には伊勢神宮や出雲大社の出張所も置かれました。
In the early 17 th century, Kokura's ruling Hosokawa Clan took an avid interest in foreign culture, especially Christianity. Their support continued until the religion was banned in tandem with the central government's decision to go into national seclusion, which took effect in 1639. Even after seclusion, however, Kokura maintained its international atmosphere as host to foreign embassies passing from the "open" port of Nagasaki up to Kyoto or Edo. It also served as the crossroads of the main routes traversing Kyushu.
在细川家族时代,藩主忠兴和忠利开始使用罗马字印章,保护天主教,建造教堂等对外国文化的关心也高涨起来,直至锁国时期为止。随着小仓的“唐船”入港,对外贸易更加繁盛。锁国后,北九州地区成为外国使节从长崎前往京都,江户的通道,进而随着九州主要街道的整建而成为各国文化的交江处,小仓城下还设置了伊势神宫及出云大社的分社。
在細川家族時代,藩主忠興和忠利開始使用羅馬字印章,保護天主教,建造教堂等對外國文化的關心也高漲起來,直至鎖國時期為止。隨著小倉的“唐船”入港,對外貿易更加繁盛。鎖國後,北九州地區成為外國使節從長崎前往京都,江戶的通道,進而隨著九州主要街道的整建而成為各國文化的交江處,小倉城下還設置了伊勢神宮及出雲大社的分社。
호소카와씨 (細川氏) 의 시대, 번주 (藩主) 인 다다오키 (忠興) 및 다다토시 (忠利)는 로마자의 인감을 사용하고, 쇄국까지는 천주교 신도의 보호 및 교회당을 만드는 등, 외국문화에 관심이 높았다고합니다. 또한, 고쿠라 (小倉)에는“당나라의 배 "가 입항하여, 외국무역도 번성하였습니다. 쇄국 이후에도 기타큐슈 (北九州)의 지역은 나가사키 (長崎)로부터 교토 (京都).에도 (江戸)를 통하는 외국사절의 통로에 해당하고, 또한 규슈 (九州) 주요 가이도 (街道)의 정비로, 여러 나라의 문화의 교차점이며, 고쿠라성 (小倉域) 아래에는 이세신궁 (伊勢神宮) 및 이즈모다이샤 (出雲大社)뾰률 츠찬)의 출장소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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